"그 책임은 여자에게만 있나요?"
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세상에는 애초에 논의의 대상이 아닌,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가 찬반을 두고 다툴 수 있는 가치관의 문제로 오인되거나, 금기(박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낙태죄가 그 중 하나로, 지금껏 국가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취급해왔는지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안이다. 여성이 임신을 지속할 자유와 지속하지 않을 자유는 온전히 그 여성의 선택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헛소리도 첨언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베토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세포의 미래를 안타까워하지만 베토벤이 아니더라도 차곡차곡 자신의 생을 쌓아온 여성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마리아도 아메바도 아니니 혼자 임신했을 리는 없는데, 지우면 지웠다고 낙태충 낳으면 낳았다고 미혼모 또는 맘충이다.
연애를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감별하려는, 사실은 "못해요"라고 울면서 말하기를 바라는 시뻘건 눈들이 열심히 비연애 인구를 쫓아다닌다. 아 쫌, 못하든 안 하든, 그게 뭣이 중헌디? 우리의 무수한 선택과 취향, 의지, 욕망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강요되는 것과 저항하는 것, 주입된 것과 선택하는 것으로 뒤엉켜 있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노래는 봄을 즐기는 누군가에게, '그 좋음'을 아니꼬워하는 누군가 놓는 '일침'이다. '니 남자친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노래가 저격하는 대상은 여성이다. 커플 전체가 아니라, (내가 아닌) 누군가의 여자친구. 가사를 보면 노래 속 커플들은 남자친구의 속도 모르고 착각에 빠진 여자와, 사실은 PC방에 가고 싶지만 참고 지겨워하는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오지랖으로 남의 비연애 상태를 폄하하는 것만큼이나, 지레짐작으로 남의 연애를 비하하는 것도 무례한 일이다.
아름다움은 확실히 취향을 탄다. 여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못생김도 취향을 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언컨대, 못생김에도 취향이 있다. 오랫동안 연애하지 않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누군가는 "눈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 말에 내포된 메시지는, 뭐, 그런 거였다. "니 주제에 얼굴 따지냐." 한때는 "저는 얼굴 안 봐요" 하고 손사래를 치며 나의 결백함, '개념'을 인증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무한 시도인지 안다.
20대 초중반의 연애는 항상 '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대학생'의 일상으로 가시화된다. 이것은 20대 초중반이 종종 '대학생'으로 뭉뚱그려지는 안이한 범주화와도 관련이 깊다. 미디어나 풍문 속 연애는 언제나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연애의 대상은 '복학생 오빠'거나, '새내기 여대생', '과 선배'의 기표로 등장하고 소비된다. 연애 자본은 이렇게 계급화된 학벌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연애가 정말 그토록 자연스럽고, 지극히 좋은 것이며, 청춘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마땅한 가치라면, 어째서 이 사회는 청춘을 항상 '대학생'으로 소환하고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이상적 로맨스로 제공하느냔 말이다.
깔끔한 위생 상태와 무난한 옷차림, 맥락 없는 거친 말은 주의할 것, 사소한 점을 칭찬하기, 상대의 말을 잘 듣고 호응해주기 등. 그런데 이것은 꼭 연애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 자체에서 필요한 기본 예의범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런 기본 예의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과 만나주지 않는 환상 속의 그대를 욕하고 증오하는 이가 많다. 혹은 연애의 가능성이 있을 때는 그나마 성의를 보이다가, 상대에게서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애인이 있거나/ 결혼했거나/ 구애를 거절하거나) 돌변해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사람들은 '연애 고자'라기보다는 대인관계나 성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상대가 취했다고 동의 없이, 혹은 정신은 차리고 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할 때 혼자 멋대로 '뜨거운 밤'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썸도 데이트도 아니다. 그냥 엄연한 범죄다. 맨정신으로 정정당당하게 좀 하자. 못하겠거든 안 하면 된다. 이렇듯 술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나 태도, 꿍꿍이(!)는 다 천차만별이기 마련인데, 꼭 연애에 술이 필요하다면... 그냥 필요 없다고 전해라~.
다행히 대학 신입생은 연애 시장의 핫 매물이어서, 미팅과 소개팅 급행열차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탔다. 그때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파스타, 오, 파스타, 파슷...하! 지금이야 메뉴가 다양해지고 소개팅 방식도 다채로워졌지만, 그 무렵엔 그냥 기승전파스타였다. 적당한 분위기, 적당한 가격, 적당한 위치, 적당한 맛의 식당에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몇 테이블 건너 연애의 장에 나선 이들이 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소개팅 중이거나, 이제 두 번째 만나는 중이며, 공기가 참 어색하고 민망하고 어딘가 연극적이고 그렇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일단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홉뜨고 나에게서 어떤 '하자'를 찾아내려고 한다. 연애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요소가 하나라도 포착되면,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열폭'이나 '정신승리'로 번역된다. "못하면서 안 하는 척한다"거나, "자유 되게 많을 것 같은데"라는 빈정거림도 간간이 들린다. 이렇게 상대방의 비연애 상태를 폄하하는 일은 매우 쉽다. 그것은 개그 프로그램과 같은 각종 미디어,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하지 않을 자유'가 성립되지 않는 '~할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